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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기억하는 공동체,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
2026년 5월 8일 미주조선일보 전문가 칼럼에 실린 글입니다.
영국의 작은 마을 웨스터햄(Westerham). 그곳에서 저는 12세기에 세워진 한 교회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성모 마리아 교회(St Mary the Virgin)’. 처음에는 그저 오래된 건축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저는 단순한 공간이 아닌 “시간” 속으로 들어왔다는 깊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교회 안에는 수백 년의 역사가 고요히 숨 쉬고 있었습니다. 벽에는 왕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고, 세례대에는 전쟁영웅의 이름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 사이에는 이름 없이 사라진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기록되지 않았지만, 분명히 그들은 이 공동체의 일부였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저는 스스로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죽음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죽음은 여전히 불편한 주제입니다.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꺼리고, 준비하는 것을 미루며, 기억하는 일에는 더욱 인색한 모습을 보입니다. 많은 경우 죽음은 단지 “끝”으로 여겨집니다. 장례가 끝나면 삶도 끝난 것처럼, 기억도 점차 사라지곤 합니다.
그러나 영국의 교회는 전혀 다른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연결”이었습니다. 세례를 통해 시작된 삶이 죽음을 지나 다시 공동체 안에서 기억되는 흐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생애는 개인의 이야기를 넘어 공동체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세례대’였습니다. 그 위에서 한 장군이 세례를 받았고, 그 사실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되고 있습니다. 단지 위대한 인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이 공동체 안에서 시작된 삶의 일부였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저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왜 우리의 죽음을 기록하지 않는가?
왜 우리의 삶을 공동체의 역사 속에 남기지 않는가?
한인사회를 돌아보면, 우리는 놀라울 만큼 죽음에 무관심한 모습을 보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죽음 이후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살아갑니다.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자녀를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붓습니다. 그러나 그 삶이 끝난 이후, 그 의미를 어떻게 남길 것인지에 대해서는 깊이 고민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장례는 치르지만 기억은 남기지 않습니다.
사진은 남기지만 이야기는 전하지 않습니다.
이름은 존재했지만, 결국 잊혀지고 맙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일은 단순히 장례를 준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 삶의 의미를 어떻게 남길 것인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영국의 교회에서는 한 사람의 삶이 공동체의 일부로 남습니다. 이름이 새겨지고, 이야기가 전해지며, 기억이 이어집니다. 그것이 바로 “역사”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부모님의 삶을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그분들이 어떤 시간을 살아오셨는지, 어떤 고통과 기쁨을 지나오셨는지, 얼마나 기억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그 이야기를 다음 세대에 전하고 있습니까? 죽음을 외면하는 사회는 결국 삶의 의미 또한 잃어버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삶을 완성하는 마지막 장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준비하지 않는다는 것은, 삶의 마지막 문장을 쓰지 않은 채 책을 덮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그 교회에서 한 가지 깊은 통찰을 얻게 되었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기억될 준비가 된 삶의 완성”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어떻게 기억되기를 원하는가? 나의 삶은 어떤 이야기로 남을 것인가? 나의 자녀와 후손들은 나를 통해 무엇을 배우게 될 것인가? 죽음 준비는 결코 두려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인간적인 행위입니다.
“사랑합니다.”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 “용서합니다.” 이 네 가지 말을 남길 수 있다면, 그 삶은 이미 충분히 아름답게 완성된 것입니다.
웨스터햄의 작은 교회는 저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삶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기억되지 않을 뿐입니다.”
이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죽음을 단순한 끝으로 남길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삶을 역사 속에 남길 것인지. 죽음을 기억하는 공동체는 강합니다. 그들은 삶의 의미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의미는 다음 세대로 이어집니다. 지금 우리의 삶 또한 언젠가는 누군가의 기억이 됩니다. 그 기억이 사라지지 않도록, 우리는 오늘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결국 삶을 완성하는 일입니다.
미주조선일보 원문: 죽음을 기억하는 공동체,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